부끄러움

세 살 버릇

투립 2013. 9. 19. 23:46

   "토끼가 평생을 뛰어다녀도 5년 밖에 살지 못 한다" 는 우스갯 소리는 운동을 싫어하는 내겐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해주는 위안거리다.

 

 단지 오래 살겠다는 일념으로 운동에 매달리는 사람들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면서도

 뒤집어보면 시커먼 내 속내가 보인다.

  

  막 신도시 입주가 시작되고 새로 들어선 백화점 꼭대기 층에 자리 잡은 실내 수영장은 입소문이 나 

등록도 쉽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려 중간에 들어간 나는 주위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재주까지 없어 여자 스모 선수 같이 생긴 S를 중심으로 한 보이지 않는 텃새를 감내해야 했다.

 

한 번은 S가 샤워실에서 양손을 허리에 얹은 채 일방적으로 다른 회원에게 주의를 주고 있고 다른 한 쪽은

무얼 잘못했는지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 모습을 본 뒤로는 스스로 소외를 즐기며 개근 중이었다.

 

 도난 방지를 위해 통장과 도장을 분리해서 보관하던 때가 그리 오래 전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매스컴의 과장 된 표현 덕분에 더욱 더 체감 온도가 높게 느껴지던 그 여름 날,

수영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은행에 들를 양으로 통장과 도장을 모두 가지고 집을 나선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둘을 모두 사물함에 보관하고 자리를 비우자니 불안한  생각이 들어 통장은 사물함에, 도장은 비닐 봉지에

야무지게 여미어 가방에 챙겨 넣고 수영장에 가지고 들어갔으나 강습 중에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수업이 끝나고 서로 다른 반이 들고 나는 시간에 샤워실은 언제나 북적거렸고

그날도 모두 우르르 몰려나와 샤워를 하느라 바닥엔 금방 물이 벙벙하게 차올랐다.

 

 겨우 배수구 옆 자리밖에 차지하지 못해서 찝찝한 기분으로 빨리 샤워를 끝내려고

발을 이리저리 옮기며 서두르고 있는데

S께서 '오늘은 아줌마 안 나왔으니까 대강 대강 하시지" 하는 말씀과 함께

머리카락을 거르는 소쿠리를 발로 쓰윽 내 곁에 밀어 놓는 게 아닌가?

 

 무례한 행동에 응할 생각도 아예 없었지만 못 본 척 태연을 가장하기도 쉽지 않았다.

저지르긴 했지만 이내 거두어 들이지 못해 찔금한 S의 발가락이 소쿠리 옆에서 잠시 꼼지락 거리는가 싶더니

들으란 듯 큰 소리로 "머리카락 좀 주워 담으면 손가락에 부스럼나나? 좋은 일 좀 하시지....."하고 이죽 거렸다.

 

주위에 흥미로운 시선까지 느껴져 온통 머리 속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릴 때 쯤

가방 정리를 하던 분주한 손끝에 비닐 봉지 안에 든 화장품 샘플이 만져졌다.

 

만져지는 느낌도 영락 없이 미쳐 버리지 못해 따로 싸놓은 화장품 샘플임에 의심할 바 없어서

그만 저만치 S옆에 놓인 퍼어런 쓰레기통을 조준하여 보란듯이 던져버리고 말았다.

 

흥분하면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그날은 한 번에 도장을 쓰레기통에 명중시킨 것이다.

 

  감정에 휘말려 결국 두 사람 모두 한심한 꼴이 되기 전에 자존심을 추스르며 자리를 피하려고

샤워실을 나와 버렸지만 불편한 마음을 삭이지 못해 은행에 들를 일도 잊어버리고

그 날 저녁 늦게 까지도 화장품 샘플이 아닌 인감도장을 그 퍼어런 쓰레기통에 버려 버린 것을 알지 못했다.

 

  인감 변경을 위해 구청, 동사무소, 은행, 증권회사로 며칠 동안 발품을 팔면서는 더욱 괘씸한 생각이 들어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고쳐 주리라고 별렀다.

 

정면 대결은 피했으나 그 후론 종종 S와 마주칠 때마다

상대가 먼저 고개를 떨굴 때까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인감 폐지제에 관한 뉴스를 들으면서 십 수년 전 그 일이 떠올랐는데 지금도 비슷한  일에 부딪치면 

말이나 행동으로 양쪽 모두 상생할 수 있는 가슴 넉넉한 어른이 되지 못했다.

 

그뿐더러 마음의 미묘한 움직임을 솔직한 자기 고백으로 드러낼 수 있는 용기가 부족해

글쓰기를 주저하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귀가 순해져 남의 말에 감정이 상하지 않는다는 이순의 나이가 지나고도

이런 주제의 글을 쓰고 있다니 피식 웃음이 나기도한다.

 

  신앙을 가진 지금은 자극이 오면 일단 멈추고 그 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습관을 드리려 애쓰고 있다.

사랑이 용서가 좋아서가 아니라 사랑과 용서를 그 분이 좋아하시니..............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접하면 바로 평상심을 잃어버려 일을 그르치는

세 살 적 버릇을 여든까지 가져 갈 수야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