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전율!

끄덕끄덕1

투립 2014. 7. 28. 18:55

  

  길을 잃어야만 발견되는 길이 있다.

       익숙한 길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깨닳음이 있는 낯선 새 길. 

   늙은 아버지 낮아진 등에서 빛나는 세상 한 채가 초라하게 주저앉을 때.

   돈을 거져 주는 사람은 산타크로스 밖에 없다.

  

   조변석개하는 것이 민심,

      여론 조사는 질문에 따라 결과를 윤색할 수도 있어요. 

   사람들이 노력은 하지 않고 걱정만 하는 것은  걱정하는 데 비용이 들지 않기 때문.

       그냥 걱정만 하는데는 시간도 잘 간다.

  사람들은 작은 돌에 걸려서 넘어진다.

      바위에 걸려서 넘어지지 않는다.

  성공의 반대말은 실패가 아니라 불성실이다.

  유산은 죽으면서 남겨주는 것이 아니다.

     살아가면서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친구는 천하지 않아

  "싸구려 위로는 가라" 힐링으로 넘쳐나는 세상에 대해 눈 속임이라고 비판한다.

      유학자인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힐링의 구호가 가득한 세상에 대해

      "위로라는 설탕을 너무 투여해서 당뇨병에 걸릴 지경"이라고 말한다.

      진중권 동양대 교양학부 교수는 "힐링 이데올로기에는 상처의 근원을 외면하려는 얄팍함이 숨어있다.

  맑고, 순수하고, 늘 긍정적이고...... 지루하지.

  한국 사회는 공포의 문화(시장 경제에 낙오될까 봐)

                   와 선망의 문화(돈과 권력에 대한 선망)가 지배한다

  전체를 한마디로 응축할 수 있는 능력

  그대는 나의 봄입니다.

  내가 돌아 간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가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우리 관계의 지속을 유지했다.

      섹스 뒤에 잊지 않고 엉덩이에 해주는 가벼운 키스는 우리 사이에 말할 수 없는

      정서적 교감을 주었고 번번히 나는 그에게로 돌아갔다.

  참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떤 경우(예:아우츠비츠)에서도 의미있는 삶을 산다 

   아우츠비츠에서 독일 병사의 손가락 하나에 운명이 좌우됐던  사실도

      운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 그 가스실에서 바로 하느님께로 넘어가는 것!

       남은 것은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내려 놓는 것, 포기하는 것처럼 큰 신앙은 없다.

     즉 하느님께 모두 맡긴다.

   마음에 깊이 울리는 음악이란 귀에 전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마음 깊이

           울리는 음악이다.= 문향: 향기를 듣다.

      "서울의 소리를 듣는다. 런던, 뉴욕, 동경 그 도시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 철저한 자유인이며 전위 음악가

           존 케이지가 내한 했을 때 한 말

             

     

  배짱을 부리면 하느님께서 해결해 주신다.

  나의 선행을 통하여 연옥 영혼을 구하시고 나를 천당으로 인도하소서.

  완덕은 하느님께서 채워 주셔야 가능하다.

      제일 나쁜 것을 가지고 즐거운 마음으로 가는 사람, 그것이 덕이다.

       덕의 씨앗이 열매 맺게해야한다.

       그리하여 덕이 취미 생활이 되게해야!

      밤에 잠 잘때  나의 영혼을 당신께 드리나이다(맡기나이다×)라고 기도!

  하느님 영광 받으소서의 올바른 뜻:

       내가 잘 되어서 하느님 영광 받으시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말이나 행동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인 것을 감동 받으므로써

          그로인해 하느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뜻

    성인은 뉘우침으로 기도하는 죄인이다.

   삶의 의미를 묻지마라

       의미 이전에 실존이 있기 때문이다.

       의미 이전에 우리는 살고 있다.

   타인을 사랑할 때 내 마음이 행복해 지니까 나를 위해서 남을 사랑한다

   하느님의 말씀과 사탄의 유혹을 구별하려면/

      (예: 위폐를 구분하는 사람들은 위폐를 보지 않는다.

              늘 진짜만 보기 때문에(진리) 가짜를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네 왼편에서 천명이 쓰러지고

       네 오른편에서 만명이 쓰러져도 나는 너를 구하리라"(시편)

       는 뜻은 어려움에 나만을 구하신다는 뜻이라기 보다(물론 개인적인 경험은 있을 수 있다)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께 완전한 신뢰에서 벗어나지 않음으로써 구함을 얻는 것.

   어떤 사람이 개인적인 은총을 얘기할 때 귀엽게 봐 줄 수 있다.

      그러나 삼사십년 신앙을 가진 사람이 하는 말이라고 하기에는 성숙함이 없다.

       미사를 보고 오는 차 안에서 신자들이 사고를 당했어도 그 순간 아버지와

       어떤 관계에서 죽었느냐가 문제.

        즉 우리의 궁극의 목적은 구원에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다 이루지 못한 꿈과 욕망 조차도 감사드린다.

        다 이루었다면 죽기 싫을 것. 눈을 허옇게 뜨고 죽고 싶지는 않을 것.

   나에게 원의가 있지만 감사와 찬미를 거두어 가려는 유혹을 홀로 처리할 능력이 없음을

      자인하는  바오로의 로마서(7:18~19)가 생각난다.

      인간 모두의 실존적 현실!

      또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인간은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것을 향해 가는 존재다.

       즉 그리스도를 품고 살아야한다.(갈라디아서2:20)

       어떤 어려움과 환란이 있어도 하느님을 통해 위로가 되고 결국은 나를 지키시는 하느님이시다.

       

 

 "To be or not to be"가 한국에 오면 "죽느냐 사느냐"로 바뀐다.

              "주야"가 "밤낮"으로 바뀌듯이......

 

 물질관이 변하지 않고는 진정으로 그 사람의 삶이

                    바뀌었다고 할 수 없다.

흐르지 못하고 심중에 남아있는 이 못난 그리움이여.              

           또다시 저지르고 싶은 아름다운 과오여!

아버지가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일찍 죽어주는 것이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같이 가져온 것이 매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