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스크랩] 사랑-데쟈뷰/ 나금숙

투립 2014. 4. 9. 16:22

 

 

 

사랑-데쟈뷰/ 나금숙

 

 

언젠가 이 밀밭에 온 적이 있다

이 찰진 흙을 밟고 가다

풀숲으로 미끄러진 적 있다

네 팔이 내 허리를 안은 적 있다

종달새의 둥지처럼 아늑한 네 품에서

젖빛 하늘에 취한 적 있다

내가 처녀인 적이 있다

너와 팔베개하고 한잠 자고 나면

깃털처럼 가벼워지던 아침이 있다

멀리 소풍가자고 꽃시절 다 간다고

손잡아 끄는 너를 팔랑팔랑

천 년 전에 따라 나와

나 아직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 시집『레일라 바래다주기』(시산맥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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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 처음 겪는 일이거나 상황임에도 일이 전개된 순서나 장소 따위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현상을 ‘데쟈뷰’라고 한다. 뇌가 저장된 기억의 자취를 더듬는 과정에서 잠시 교란을 일으키거나 신경 세포의 혼란으로 마치 전에도 똑같은 장소에 있었고 동일한 일이 벌어진 것처럼 착각하는데, 기시감(既視感) 혹은 기시체험으로 번역되는 불어의 심리학 용어이다. 낮선 길을 걷는데 언제 한번 지나간 적이 있는 느낌, 전혀 본 적이 없는 얼굴인데도 낯설지 않은 느낌, 친구들과 대화하는데 전에 비슷한 대화를 했던 것 같은 느낌. 누군가가 어떤 일을 하는데 다음에 무슨 일이 이어지리란 것을 아는 느낌 등이다.

 

 일부 심리학자들은 데자뷰를 내면 깊이 감춰져 있던 욕구가 돌출되는 ‘소망실현의 수단’ 이라고 설명한다. 전생을 믿는 사람들은 전생의 기억에 대한 증거라 하기도 하며, 양자 물리학자들은 우주의 시공 구조가 왜곡됐을 때 ‘평행 우주’가 우연히 교차하면서 생기는 현상일 수도 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은 보통 사람이 낯선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뇌에서 그 환경에 익숙해지도록 의도적으로 착각을 일으키는 현상' 이라고 한다. 급격한 환경변화로 인해 자신의 몸에 부담을 주기 전에 “이건 새로운 것이 아냐, 언젠가 했던 익숙한 것이야” 라고 일종의 자기암시를 뇌에 걸어서 스트레스를 줄인다는 것이다.

 

 이 시에서 진술된 정황 역시 천 년 너머 전생의 기억을 좇는 사랑이 있었고, ‘밀밭’과 ‘찰진 흙’ 그리고 ‘풀숲’ 등은 전생의 기억을 현생으로 불러낸 풍경들이었을 것이다. 풍경은 기억을 호출하여 왠지 낯설지 않은 것들 앞에서 아득한 전생의 기억을 더듬는다. 그 때문에 어디선가 이미 본 듯한 사람이고 장소이며 포옹인 것이다. 어쩌면 전생에 ‘삑사리’가 난 ‘사랑’의 ‘소망 실현의 수단’이 작동했을지도 모른다. 사랑이란 억지로 엮으려 한다고 엮일 성질의 것이 아니며 집착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의도적 자기 암시가 마음을 열어 ‘풀숲으로 미끄러’지게 했고, 그래서 사랑이 왔던 건 아닐까.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과거에도 인연이 닿았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더구나 과거에 빚이 있거나 풀지 못한 매듭이 있었다면, 그 사람이 더 각별하고 소중하게 느껴질 수 있겠다. 사는 일이 아득해질 때면 전생에서의 사랑을 상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천 년 전에 따라 나와’ ‘아직 집에 돌아가지 못한’ 것이 인연이고 운명이라면 그 명주실 꼭 부여잡고 아예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도 ‘사랑’ 아니겠느냐.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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