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모두 세상의 겉모습(色)만 본다. 붓다는 다르다. 겉(色)과 속(空)을 함께 본다.
둘을 동시에 뚫어서 본다. 그래서 흔들림이 없다.
생로병사로 인한 삶의 폭풍이 아무리 거세게 몰아쳐도 붓다는 여여하다.
왜 그럴까. 폭풍(色) 속에 깃든 공(空)을 함께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는 소리에 놀라지 않고,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
눈을 뜬 붓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시 인도 사람들은 자신이 오리라고, 중생이라고 생각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오리라고, 중생이라고 여긴다. 붓다의 눈에는 달리 보인다.
겉과 속을 함께 뚫어서 봤더니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그들의 속성과 붓다의 속성이 똑같다.
그래서 불교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중생이 아니야. 너는 본래 부처야.” 그래도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그게 무슨 뜻인지. “그건 깨달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이야”라며 오히려 붓다의 시선을 반격한다.
그리스도교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자신이 오리라고,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을 향해 예수는 간곡하게 말한다. “너는 본래 하느님의 자녀야. 하느님께서 ‘신의 속성’을 네 안에 불어넣어 주셨지. 그러니 네 안에는 애초부터 ‘하느님 나라의 속성’이 흐르고 있어.
다만 선악과를 따먹은 후유증으로 너에게 착각이 생긴 거야. 에고의 착각이지.
그 착각 때문에 네 안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는 거야.
그런 착각을 부수는 통로가 ‘자기 십자가’야. 그러니 그걸 짊어지고 나를 따라와라!”
이 대목에서 나는 ‘붓다의 외로움’이 읽힌다. 세상의 쓸쓸함과 다른 차원의 쓸쓸함이다.
모든 이의 눈앞에 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땅. 해탈의 땅. 오로지 붓다만 그 땅을 보고 있었다.
그때 붓다에게 음성이 들렸다. 팔리어 경전에는 그게 ‘브라흐마(Brahma)의 목소리’라고 돼 있다.
흰두교에서 브라후마는 창조의 신이다.
붓다는 자신의 가르침을 ‘불사의 문’이라 불렀다. 왜 그럴까.
우리가 그 문을 통과할 때 삶과 죽음을 나누는 문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문턱이 사라진 자리에서 ‘우주적 눈’이 드러난다. 붓다의 눈이다.
붓다는 지금도 우리에게 “그 눈을 떠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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