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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덩치 눕힐 때 쾌감처럼, 설득력있게 상식을 뒤집을 때 '섹시'/김영민

투립 2019. 2. 10. 21:01



거대한 주장을 입증하거나, 상식을 뒤엎는 일은 쉽지 않다.

당신이 상식을 뒤엎는다면, 일단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박해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저 친구는 왜 저렇게 튀는 거지? 상식을 신봉해 오던 사람들은 자존심이 상한 나머지,

당신의 혁신적인 주장에 물타기를 하려 들지도 모른다.

음, 당신 주장은 새로워 보이지만, 크게 보자면 기존 주장과 다를 바 없어,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있나, 운운.

세상의 많은 혁신적인 주장들이 그런 식으로 중성화 수술당해왔다. 그

러나 당신이 확고한 증거를 들이대며 상식을 전복하는 데 성공한다면, 역사가 당신을 기억할 것이다.

천동설을 비판하고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처럼. 



당신이 경험적 지식과 논리적 훈련과 날렵한 상상력으로 단단히 무장하지 않은 한,

당신이 상식을 쓰러뜨리기 전에, 상식이 당신을 패대기칠 것이다. 


혁신적인 주장은 엄밀한 증명을 특징으로 하는 과학의 영역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 나오는 사생아 에드먼드는 사생아를 멸시하는 정실부인 자식들의 상식을

이렇게 뒤집어 놓는다. “사생아가 비천하다고? 사생아는 자연스럽게 불타는 성욕을 만족시키다가 생겨난 존재이니,

지겹고 따분한 침대에서 의무 삼아 잉태된 정실 자식들보다는 낫지!” 오, 어쩐지 그럴듯하다.  



상식에서 벗어나지만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해내는 사람은 섹시하다.

그런데 덩치가 큰 상식을 때려눕히고 새로운 주장을 설득력 있게 제기하려면,

축적된 경험적 지식, 논리적 분석력, 발랄한 상상력이 모두 필요하다.  
 
그런 것들을 생략한 채 서둘러 섹시해지려고 하는 학인(學人)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점쟁이의 길이다.

그 함정에 빠지면, 딱히 증명하기 어려운 모호한 말들을 가지고 혹세무민을 일삼게 된다.

이를테면 이렇게 말하는 거다. “좀처럼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 정치는 겉보기와는 달리 약한 구석이 있네요.

올해 국민들은 이러한 정치적 혼란을 정리해 줄 새로운 정치인을 만나게 될 겁니다.”

이런 발언은 학자라기보다는 점쟁이의 말을 닮았다.


불안을 이기지 못해 점집을 찾아온 당신에게 점쟁이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겉보기와는 달리 속으로는 여린 면이 있네요.” 헉! 어떻게 알았지?

점쟁이는 이어서 이렇게 말하는 거다. “올해 귀인을 만나게 될 겁니다.

” 반증 가능성(反證可能性)이 없는 예언의 언어를 남발해 온 학자들도 때로는 학술상을 받는다.

당신이 수행한 연구는 매우 ‘용하기에’ 이 상장과 소정의 ‘복채’를 드립니다. ㅎㅎㅎ


김영민 /하버드대에서 동아시아 사상사 연구로 박사학위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